[Voice of MWTV] 한국 사회와 난민② 동두천의 아프리카 난민

MWTV | 2017.04.27 23:11 | 조회 222

Voice of MWTV | 이 칼럼은 이주민방송 운영위원과 사무국 활동가들이 기고하는 칼럼 공간입니다. 

 

한국 사회와 난민 

동두천의 아프리카 난민


글. 김대용


먼저읽기: 한국 사회와 난민 ①난민에 대한 이해


동두천과 난민



▲ 1960년대 동두천 미7사단 캠프 케이시 주둔 지역의 상가 풍경 (출처: http://brucerichards.com/army/ccasey2.htm)


    동두천과 미군 제7사단

    동두천은 1951년 미군 제7사단이 주둔하면서 이방인들과의 오랜 동거가 시작된 지역이다. 미군이 지역에 자리하면서 동두천에는 미군 군속과 그 가족들 등 많은 외국인이 유입되었고, 지역의 많은 영역을 미군이 차지하며 수십 년을 지내왔다. 미군 부대 인근에 미군 병사를 통해 생을 영위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위락지역을 형성했고, 그런 지역은 한인과 미군이 자연스레 섞여 지내게 되었다. 


    동두천에 자리잡는 아프리카 난민들

    아프리카 난민들이 동두천을 선호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미군부대가 위치한 보산동과 동두천동에는 작은 방이 여럿 딸린 오래되고 허름한 집들이 많은데, 미군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지금은 비어있는 집들이 많아졌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아프리카 난민들에게는 저렴한 비용에 주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두천이 제 1의 선택지로 꼽힌다. 둘째, 미군기지 주변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다인종 다문화에 노출되어 왔기에 검은 피부에 익숙하다. 주민들이 집에 사글세로 함께 지내는 것에도, 빈집을 세 주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셋째, 동두천 주민들이 주로 살고있는 지행동의 아파트 단지에 있는 학교는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을 잘 받아주지 않는 반면, 보산동에 위치한 보산 초등학교와 oo중학교는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의 입학에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지 않는다. 


    위의 여러 가지 이유로 동두천에 자리를 잡은 난민들은 서로 나름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지속적인 유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라이베리아 내전을 피해 14살에 국경을 넘은 소녀

    필자는 39살의 라이베리아 여성 A를 인터뷰했다. A는 라이베리아 내전으로 눈앞에서 부모를 잃고 형제, 자매, 사촌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14살 소녀 A는 홀로 국경을 넘어 가나에 있는 난민촌으로 들어갔다. 무려 16년을 가나에서 지내게 되었고, 12년 째에 딸을 출산했다. 그녀는 가나의 난민 캠프에서 한국행을 권유하는 라이베리아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무작정 딸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가나 난민 캠프에서 한국의 동두천으로

    그녀는 동두천에 먼저 자리를 잡은 자국인들이 꽤 있다는 이야기를 인천공항에서 한국 사람을 통해 듣게 된다. A는 초등학교 입학 연령의 딸을 데리고 무작정 동두천으로 왔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었다. 얇은 옷을 입은 모녀는 추위에 노출된 채 서울의 북쪽 어딘가에 있다는 동두천의, 동두천에 있을 동족들의 선의를 희망하며 캄캄한 밤중에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동두천은 북쪽에 있어 몹시 추웠다. 추운 겨울 밤 난생 처음 만나는 도시, 기댈 곳 하나 없이 낯선 땅에 도착한 A의 막막함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14세 나이에 죽음의 문턱을 건넜던 A에게 추위나 낯선 느낌 따위는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음을 견딘 삶이고, 뚫고 지나가야 열릴 삶의 길이었다. 


    갈 곳을 몰라 헤메이던 모녀는 동두천의 보산역 인근의 외국인 교회를 찾아냈고, 교회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지원해 주어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 한다. 교회에 지내던 중 난민을 지원하는 ‘피난’2)을 알게 되고 피난이 지원하던 먼저 온 라이베리아 난민을 소개 받아 그들과 숙소를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숙소는 라이베리아 남성 8명이 함께 쓰고 있었다고 한다. 남자들만 사는 곳에 지내게 된 두 모녀의 어려움과 난처함 또한 상상이 되지 않는다. 2달간의 그런 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세이브더칠드런’3)의 도움으로 방을 얻게 되면서다. 그들의 도움으로 동두천에서의 첫 정착을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2) 사단법인 피난처(Refuge pNan), 박해와 전쟁을 피해 타국으로 피난한 국제 난민들과 북한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난민들이 힘과 도움을 얻어 어려움을 이기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독 NGO.

3)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아동 관련 NGO 중에서 가장 오래된 최대의 기구. 1919년 에글렌타인 젭이 창립. 경기 북부의 이주 노동자와 난민을 지원하고 있는 ‘엑소더스’의 난민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세이브더칠드런의 사업은 실제적 지원을 효율적으로 하는 믿을 만한 기구이다.


▲ 동두천 보산역 인근의 외국인 교회에서는 아프리카 난민들의 모임이 매주 열린다. (관련 기사 : 우리 아이들의 집은 어디인가요, 동두천 난민가족들의 외침 /MWTV 2016.8)


      A를 소개해준 엑소더스의 활동가는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동두천에 있는 아프리카 난민 중에서 형편이 좋은 측에 속한다고 귀뜸해 주었다. 인터뷰는 그녀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A의 가족은 동두천의 외곽에 있는 평범한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난민이어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을 것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름 깨끗하고 정돈된 내부를 보고 약간 의아했다. 그곳이 그녀가 집을 구하던 당시 전세금 없이 월세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집이었다는 그녀의 설명을 나중에 들었다. 

   

    나이지리아 출신 남편을 만나다

    A는 이지리아 출신 남편과 5년 전 만나 결혼하여 1년 전 아들을 낳았다. 남편은 안정되고 급여가 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인터뷰를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며칠 전 공장에서 일하던 중 왼손 셋째, 넷째, 새끼손가락이 기계에 말리는 사고를 당해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사장님을 만나 산재 처리를 할 수 있었다며 고마워하고 있었다. 일을 못하면 어찌 살 생각이냐 물으니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 공장에서 일하던 중 왼손 셋째, 넷째, 새끼손가락이 기계에 말리는 사고를 당한 A씨의 남편 ⓒ김대용


    남편의 이야기

    남편은 7년 전 한국에 와서 버는 돈을 본국 본가에 보냈다. 본국에서는 그의 부모님이 그 돈으로 가게를 장만하고 아들이 돌아오면 함께 살 바탕을 착실히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게가 불이 났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그 즉시 나이지리아로 갔는데, 가는 사이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해 행방불명이 되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죽이겠다면서 남편에게 달려들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한국에 돌아온 그는 무서워서 고국에 가지 못한다고 했다. 기거할 집조차 없는 그의 어머니에게 새 집을 지으라고 돈을 보내 주는 것으로 나이지리아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중학교 2학년 딸이 의무교육을 마치면... 어디로 가야 할까

    함께 온 딸은 벌써 많이 자라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한국말을 잘 해서 주로 통역을 했다). A와 남편 그리고 딸 이렇게 세 사람은 난민 신청을 냈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행정소송을 해보고 싶었지만 변호사를 채용할 비용이 없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아들이 태어났고, 아들을 한국에서 키우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이 한국에서 추방되지 않는 이유는 딸 때문이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인 한국에서 아이는 중학교 졸업까지 한국에 체류할 수 있고 그 보호자도 더불어 있을 수 있으니, 이제 1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한 살 박이 아들은 학생 연령이 아니어서 해당되지 않는다. 딸아이가 중학교를 마치면 어디로든 떠나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젖먹이 어린 아이를 안고 네 가족이 라이베리아로 갈 수 있을 것인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나이지리아 남편의 나라로 갈 수 있을까? 그것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부부는 한 살 박이 아들을 난민 신청해 볼 계획이라며 웃는다. 그래도 아들은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가능성이 많이 있지 않겠냐는 말을 덧붙인다. 난민을 신청하는데 한 사람당 32만원이 든다면서 한숨을 내뱉는다. 

 

    뭐 필요한 게 있냐? job!

    동두천에는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와 나이지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집세가 싸서 체류비가 적게 들고 인종에 대한 거부감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두천은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이다. 오랫동안 미군부대에 의존한 경제 구조 탓에 생산 시설이 많지 않다. 결국 동두천에 있는 아프리카 난민들에게 필요한 일자리가 많지 않다. 길거리에서 이 친구들을 만나서 ‘뭐 필요한 게 있냐?’ 물어보면 ‘job!’이라는 대답이 자동으로 튕겨져 나온다.


    아침 시간 1호선 동두천 방면 전철을 타면 배낭을 메거나 큰 가방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아프리카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동두천에 아프리카인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다. 유입되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일에 종사하는 지, 수익은 어떤지, 생활을 어떻게 이뤄 가는지, 배고픔에 힘든 일을 당하지는 않는지 등등의 역학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맺음말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2가지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첫째, 난민 발생의 원인을 해소하려는 국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 난민이 많이 발생하는 지역인 아프리카는 자본에 의해 자원, 노동, 문화 등은 물론 영혼까지도 착취당하는 신자유주의의 경제 시스템의 최대 피해지역이다. 내전과 내란의 배경이 되고 있는 자본제국주의와 자본에 대한 견제를 국제적으로 진행하고 돈보다는 사람과 생명을 우선시하는 가치를 퍼트려야 할 것이다. 또한, 난민 발생국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단지 경제적 지원이 아니라, 난민 발생국에 대한 교육 및 의료 지원을 확대하여 본국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한국에 들어온 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현재 정부의 난민 정책은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눈을 감는다고 유입되는 난민의 문제가 없어지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더 큰 갈등, 사회적 문제로 터져 나올 잠재적 위험요소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한 사회의 성숙의 정도와 정의의 정도, 인권 수준은 그 사회 가장 소외 받는 개인이나 집단을 보면 정확히 알아 낼 수 있다. 사회적 합의에 의해 보호의 사각지대를 얼마나 줄여나갈 수 있는가는 경제적인 단순 계산으로 환원되지 않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일이다. 한국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하느냐는 앞으로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 것이냐의 중요한 척도다. 정부는 난민문제를 방치하지 말고 적극적, 능동적 개입을 통해 난민에게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지켜주고, 난민들이 우리 사회에서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찾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립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구체적인 대응책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난민의 문제는 생각해 볼수록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느낀다. 단순히 주변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뻗어 도움과 위로를 주는 선행과 봉사의 차원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깊이 든다.


    우리 사회는 현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변혁의 시작점에 서있다. 사회의 정의는 비리와 부패의 척결에 의해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소외된 계층의 인권 훼손 상황의 개선 또한 사회 정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변화하는 한국 사회가 더 폭 넓게 흘러 많은 사람들과 함께 희망의 바다로 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대용 | MWTV 이주민방송 운영위원, 더불어꿈협동조합 이사장


이 땅에서 차별과 혐오라는 단어가 영원히 사라지길 바라는 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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